예수수도회 CONGREGATIO JESU

Ad Maj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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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관구 역사

예수수도회 한국관구는 1964년 독일의 뮌헨-님펜부르크 관구에서 진출하여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1973년 10월에 관구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220여명 회원들이 여러 사도직 분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수도회는 1964년 6월 10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독일 뮌헨-님펜부르크 관구에서 양성을 받고 종신서원과 첫 서원을 한 한국 수녀 5명과 독일 수녀 2명이 서울 김포 공항에 도착한 1964년 6월 10일은 한국 땅에 메리 워드 은사가 씨 뿌려진 역사적인 날이다. 진출 회원들은 한국의 첫 번째 수녀원의 건축공사 지연으로 인해 소사 인보 성체수도회 수녀원에 당분간 기거하며 오류동 수녀원 완공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오류동 수녀원 입주 후 그동안 입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한국 수녀원 원장인 박의열 수녀가 지원장을 겸하여 초기 양성을 시작하였다. 하느님의 은총과 독일 수녀원의 지원 아래 학교와 여러 분야의 사도직 활동을 통해 발전하고 있는 수도회는 진출 9년째 해인 1973년 한국 관구로 승격되었다. 본회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각 사도직 분야에서 창립자 메리 워드 정신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한국 진출 배경

예수회 박고영(토마) 신부가 독일 뮌헨에 체류하던 1953년에 여학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마리아 바르드(메리 워드) 김나지움과 레알 슐레를 둘러보면서 동정성모회(현:예수수도회)의 학교 교육과 창립자 메리 워드 정신에 감명을 받아 한국에서도 그러한 학교 설립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로 1956년 한국인 첫번째 지원자 박의열(비비안나/수도명 엘리사벳) 자매가 뮌헨-님펜부르크 관구에 입회한 것을 기점으로 1957년 총원장 에델부르가 솔츠바허 수녀는 한국 진출을 결정하고 이 추진을 뮌헨-님펜브르크 관구에 위임하였다. 한국 선교사업은 한국인 회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총원장의 뜻에 따라 타라시아 콘스탄틴 관구장 수녀는 공식적인 진출 준비로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관심을 갖게 하는 것과 건축 공사비 마련과 동시에 한국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양성하였다.

한국 진출을 위한 답사

동정성모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을 환영하는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님의 초청으로 1960년 뮌헨-님펜부르크 관구장 타라시아 콘스탄틴 수녀와 로마 총원 참사 아가다 브뤼크너 수녀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두 수녀님은 유럽과 전혀 다른 세계인 한국과 한국 교회의 실태를 알아보고 몇몇 여자 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한국의 교육 현장을 시찰하였다. 동시에 대전교구 원 라리보 주교의 초청으로 앞으로 교육 사업이 전개될 대전 지역을 답사하면서 진출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한국 선교 파견

1964년 5월 3일 뮌헨 님펜부르크 수녀원에 새로 건축한 삼위일체 성당에서 안드레아 호퍼 신부님의 주례로 한국 선교 파견식이 있었다. 한국 선교를 자원한 안나 레쉬 수녀와 비르기니에 콤 수녀와 함께 박의열 엘리사벳 수녀, 박기주 안눈시아타 수녀, 왕옥희 젬마 수녀, 송윤희 크리스티나 수녀, 성 이냐시아 수녀는 로마 총원에서 에델부르가 총원장 수녀의 축복을 받았다.박의열 엘리사벳 수녀는 5월 31일 종신서원을 한 후 타라시아 관구장 수녀와 아가다 총원 참사 수녀와 함께 항공편으로, 다른 수녀들은 제누아에서 승선한 빅토리아호편으로 홍콩에서 합류하여 6월 10일 마침내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함으로써 한국 예수수도회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첫 번째 지원자 입회와 양성

8월에 완공된 한국 첫 번째 집인 오류동 수녀원에 곧바로 지원자들이 입회하였다. 박의열 원장 수녀가 지원자들의 양성을 겸하였다. 이들이 한국에서 양성된 첫 번째 그룹으로서 1966년 2월 2일에 수련기에 받아들여지는 착복식이 있었다.

사도직 활동의 시작과 한국관구의 성장

1966년 대전성모초등학교와 대전성모여자중학교를 개교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이 시작되었다. 1973년 관구로 승격되어 박기주 수녀가 초대 관구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진출에 함께했던 두 명의 독일 수녀가 한국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1976년 독일로 돌아갔다. 대전에 관구, 서울에 수련소를 두어 회원들을 양성하고, 교회와 사회를 위한 봉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수도회도 성장해 나갔다. 1993년 박기주 수녀가 수도회 제 2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학교교육과 의료복지 봉사

한국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진출한 예수수도회는 제일 먼저 교육 사도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6년에 대전에 성모초등학교와 성모여자중학교를, 1969년에는 성모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주력하였다.

교육 사도직을 준비하는 동안 1965년에 안나 레쉬 수녀와 송윤희 크리스티나 수녀가 충북 보은으로 파견되어 보은본당 시약소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하였다. 1966년에 독일에서 귀국한 의사 정태옥 루카 수녀가 합류하면서 본당주임 백제랄드(메리놀회) 신부가 1967년에 개원한 성모의원의 운영을 본회에 위탁하였고, 1971년 본회에서 성모의원을 인수하여 병원으로 발전시키며 가난하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왔다.

1972년에는 전주교구가 한센인 돌봄을 요청하며 본회를 초청하였다. 당시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나환우 치료를 위해 익산에서 의료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독일 수녀원에서 의약품의 지원을 받았던 한센병 퇴치 봉사는 창립자 메리 워드의 정신에 따라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본당 선교와 유아교육

도시에 비해 매우 낙후된 지역의 복음화와 교육환경에 관심을 둔 본회는 1971년 보은 본당에 회원을 파견하는 것으로 지역교회 선교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2년 보은성모유치원을 설립을 기점으로 회원들이 차츰 여러 본당과 유치원으로 파견되어 선교 일선과 유아교육 현장에서 열심히 투신하였다.

한국관구 승격과 그 이후

교회와 지역 사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

1973년 10월 21일, 총원은 한국 공동체들을 독일 뮌헨 관구로부터 독립시켜 한국관구로 승격하였다. 초대 관구장으로 박기주 수녀가 임명되었다.

1980년대에는 본회에서 운영하는 대전성모학교 외에도 인천교구와 전주교구 학교에 교사들이 파견되었고, 유치원 사도직도 늘어났다. 본당의 요청에 응답하여 점차적인 파견이 이루어졌다.

이후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면서 선교 사목으로는 국내 23개 본당, 해외 한인천주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복지 분야로 눈을 돌려 무료급식소 성모의 집, 가출 청소녀 쉼자리, 공부방, 사회복지회관 사도직, 새터민 지원, 탈북 여성 쉼터, 노숙자 돌봄, 다문화 가정 교육과 동반, 가난한 이들의 수의 제작, 공시촌 청년공간 등으로 봉사의 형태와 방식이 차츰 더 확장되었다. 중국과 몽골, 필리핀과 미얀마에 뿌려지는 복음의 씨는 언젠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가 되리라 희망하며 수고하는 중이다.

2000년 이후에는 영성 사목으로서 성서 사도직과 이냐시오 영성 사도직과 피정지도와 동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