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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가치가 수도성소에 끼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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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바라기 작성일13-11-19 10:21 조회4,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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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가치가 수도성소에 끼치는 영향
 
10년 전이다. 남녀 수도회 양성장들이 공동 개최한 ‘성소 대책’ 세미나에서 발표를 맡은 적이 있다. 나는 수도성소가 앞으로 계속 감소하고, 머잖아 활동 수도회도 쇠퇴하리라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이전 10년 동안의 남녀 수도회 성소자 수 변동 추이, 수도회 대상 성소 관련 면접조사 결과,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이 현상을 경험한 미국과 영연방 국가 수도회의 성소자 수 추이 분석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나는 이 분석 결과를 토대로 성소 감소의 큰 원인이 수도회 외부의 환경 변화에 있다고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소 감소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만큼 수도회가 이 흐름을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측하였다. 예측이 맞지 않길 바랐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에서 수도성소 감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는 물질적 풍요인 것 같다. 빈곤한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지금 성소가 더 줄었고 우리보다 앞서 이런 풍요를 경험한 나라도 그랬으니 물질적 풍요와 종교적 가치는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사진은 칼럼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정현진 기자
 
 
수도성소의 감소 원인
 
내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독신 성소 감소는 여자 활동 수도회가 먼저 경험한다. 이 시기에 남자 수도회는 평수사 지망자가 줄거나 없어진다. 대부분 수사들이 수도 사제를 선호하는 탓이다. 여자 수도회 다음엔 남자 수도회 성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구 사제 성소가 감소한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종교적 독신(celibacy)’을 선택하는 이들이 현저히 줄어 사실상 성소가 단절된다.
 
한국 수도회는 다행히 아직 성소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여자 수도회는 20년 전에 비하면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래도 매해 150~200여 명의 성소자를 얻고 있다. 하지만 매해 발생하는 퇴회자, 사망자 때문에 순수하게 증가하는 숫자는 연간 백 명 이내다. 몇 년 전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 5년 내에 수도자 절대 숫자는 정점에 이른 뒤, 이후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다.
 
남자 수도회는 이보다 형편이 조금 낫다. 남자 수도회는 교구 사제 성소와 비슷하게 오랜 시간 완만한 증가세를 보여 왔다. 최근 다소 줄고 있긴 해도 여자 수도회만큼 감소세가 두드러지진 않고 있다. 반면 평수사 지망자는 현저히 줄었다. 이상의 한국 상황과 다른 나라 교회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 수도회 성소자 수 추이는 쇠퇴기 초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성소의 감소 원인은 다양한데 크게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외부 요인으로 가장 큰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물질적 풍요’다. 둘째는 물질적 풍요의 결과로 나타난 폭넓은 선택의 자유, 혼자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잘 갖춰진 사회 경제 문화적 여건이다. 셋째는 여권 신장이다. 넷째는 수도생활 말고도 자신의 좋은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종교 외부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수만 개에 이르는 NGO를 생각해보면 될 터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독신’을 기피하는 문화이다. 이는 몸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서 나타났다.
 
수도회 내부 요인으로는 수도회가 물질적 풍요에 대응하지 못하고 세속화된 것이 첫째 원인이다. 수도생활은 세속과 구별되는 속성이 많아야 매력도가 높아지는데 이에 성공하지 못한 탓이다. 둘째로 ‘수도회 세속화’라는 상황에 당면하여 개별 수도회의 카리스마와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성공하지 못한 탓이다. 마지막으로 수도회가 세상이나 교회에 대해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다. 대조적이고 대안적 측면을 교회 안팎으로 잘 드러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에서 수도성소 감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는 물질적 풍요인 것 같다. 빈곤한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지금 성소가 더 줄었고 우리보다 앞서 이런 풍요를 경험한 나라도 그랬으니 물질적 풍요와 종교적 가치는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다음에 수도회에서 경험하는 일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물질적 풍요가 성소 동기에 미치는 영향
 
풍요는 한 마디로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물질의 가치가 최우선시되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일단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사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이 남는 상황이 된다. 이른바 잉여가 많아진다. 옷은 여벌이 생기고, 품질과 디자인은 좋아진다. 거칠고 가짓수가 부족했던 음식은 부드러워지고 다양해진다. 이밥에 고깃국이 북한 동포에겐 꿈인데 우린 건강을 위해 일부러 굶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가까운 곳에 가면서도 차를 타고, 힘든 일은 남을 시킨다. 어릴 때부터 독방을 사용해 남과 함께 자는 것을 어려워한다. 겨울엔 여름같이, 여름엔 겨울같이 살다 보니 더위와 추위 모두 잘 견디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 소유의 맛을 보고, 개성화된 소비생활에 젖어있어서 몰개성화된 생활처럼 보이는 수도생활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자란 터라 남의 말에 복종하기 어렵다.
 
풍요가 본디 몸의 욕구에 일차적으로 부응하는 것인 까닭에 성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몸(혹은 물질)이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고 성은 본래의 의미보다 쾌락 추구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과도한 몸 숭배가 역설적으로 몸의 본래 가치를 더 떨어뜨리게 된 셈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은 성의 자유를 자기 몸에 대한 권리로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조기 성경험 빈도를 높이고, 그 연장에서 혼자는 살아도 성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이처럼 성적 욕망을 억제하기보다 발산하라고 부추기는 문화에서 종교적 금욕이 들어설 자리는 좁다. 당연히 그만큼 성소에 대한 동기 부여가 쉽지 않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풍요가 수도생활에 미치는 영향
 
물질적 풍요는 기성 수도자의 모습도 많이 바꿔 놓았다. 먼저 문화 향유 수준을 올려놓고 사고방식도 바꿔놓았다. 수도회가 처한 교회 상황이 풍요로워지다 보니 신자들이 알아서 수도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수도자의 욕구 수준이 올라갔고, 일단 올라간 수준이 충족되지 않을 때 공동체 안에서 욕구 불만이나 신자들과 자주 어울리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한 사도직의 필요 때문에 수도자의 고학력화, 전문화 경향이 커졌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도자의 개인 소유도 늘어났다. 개인 물품은 공동체에 청해 얻는 것이 원칙이지만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이렇게 소수가 고학력화, 전문화되자 다수 회원의 불만이 커져 공부할 필요가 없는 회원도 배려 차원에서 덩달아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수도자와 평신도의 사고방식 차이를 발견할 수 없게 된 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측면보다 사고방식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 이 때문에 최근의 문화연구자들은 자본주의적 주체 형성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소비에 길들여진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본주의가 충동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소비를 강요받는 것임에도 대부분은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적 주체 형성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혼을 내주고 물신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적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니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자본주의적 가치에 물든 사고방식이 더 큰 문제이다.
 
이 연장에서 수도자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향도 이해할 수 있다. 효율성은 경제성의 다른 말이다. 곧 ‘효율성이 돈이다.’ 수도자가 효율성을 기준으로 사람과 일을 판단하고, 또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들도 이미 자본주의적 ‘주체’이다.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 수도생활의 매력이자 본질인데 수도회와 수도자가 그 본질과 반대로 효용과 효율을 추구하게 되었다면 말이다.
 
이 두 가지 가치를 강조하다보면 자연스레 능력주의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능력주의는 회원 간에 경쟁을 조장하며, 이 경쟁은 관조와 멈춤을 열등한 가치로 보게 만든다. 병들어 누워 있는 회원도, 주방에서 묵묵히 회원들의 건강을 챙기는 회원도, 돈을 벌지 않고 회원들을 위해 봉사하는 회원도 각각 제 몫이 있다. 그런데 이들을 보물로 보는 눈이 희미해진다.
 
대체로 이런 상황이면 수도생활은 더 이상 자본주의적인 삶과의 대조 혹은 대안적 삶이 되지 못한다. 이전에는 뚜렷했던 세속과 수도생활의 경계가 희미해져 사실상 두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성소자들에게 수도생활은 매력 없는 삶의 방식이 된다. 그래서 혹시 성소 감소 원인을 진지하게 수도회 내부에서 찾는다면, 성소자의 의식 변화도 변화지만, 그 이전에 수도회가 건강하지 못해서인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대안을 찾아서
 
그러면 이렇게 자본주의적 가치와 삶의 방식이 수도생활에 깊숙이 스며든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어려운 조건에서 그마나 성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수도회와 수도자 자신이 쇄신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로 수도자가 가진 여러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이나 사도직에서 크게 버리는 것이 자신과 수도회를 살리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적 풍요가 문제라고 말했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수도자들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이 그분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요즘 사람은 보험을 들어 미래를 대비한다. 돈으로 미래에 닥칠 위험을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험은 유용한 제도임에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섭리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방식이다. 신앙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방식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혼자 더 많이’ 갖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자도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혹시 현재 한국 수도자의 삶이 이렇다면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무(無) 신앙’이다. 이럴 때는 하느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고, 그분의 섭리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해법이다.
 
그렇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쇠퇴기에 이르면 회원 숫자도 물질적 자원도 부족해지고, 변화보다 유지 관리에 먼저 신경을 쓰게 되는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 쇄신은 거친 파도를 항해하는 배의 운명과 같다. 파도가 심해지면 배에 탄 이들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또 이 상황이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를 때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된다. 이렇게 수도자 스스로 변하지 않을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이것이 그나마 풍요로운 사회에서 수도자답게 살고, 작지만 수도생활을 이 땅에서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풍요의 시대에 풍요를 거슬러 가난과 불안정을 선택하는 용기, 이것이 수도생활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징표다.
 
 
박문수 (프란치스코)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기사 제휴 / ‘영성생활’ 제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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