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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 시국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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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님평화 작성일16-10-19 08:30 조회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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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불어라

    

강론_ 이준석 신부_ 살레시오회

 

 

모든 이별에는 준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끼리도 그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고 헤어질 때는 눈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나고, 자라고, 먹고, 자고, 다투고, 사랑하고, 자립하는 생의 과정을 함께한 가족과의 이별에는 얼마나 큰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특히 그 이별이 죽음에 의한 것일 때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맺힌 것은 풀고, 소중한 기억은 확인하고, 화해하고, 다짐할 시간,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인간사의 가장 근본적인 언어가 교환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잘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행복한 삶은 이별을 존엄하게 준비하는 과정까지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국가의 의무는 국민의 행복한 삶을 공적으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권은 국민에게 서로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2014416일 수백 명의 부모 자식들에게 내 아들, 딸이어서 고마웠다.’ ‘내 아버지, 어머니여서 감사했다.’는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선사하더니, 근래 이르러서는 백남기 어르신과 그 가족에게도 준비 없는 이별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삶을 마무리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눈가에 젖은 눈물이 아닌, 참혹하게 하얗던 거센 물줄기였고, 그것이 머리를 때릴 때 번쩍이던 섬광이었습니다. 그분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촉은 꼭 잡은 가족의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아니라 아스팔트 바닥을 미끄러질 때 느낀 거친 냉기였습니다. 도대체 이 정권은 왜 이렇게 급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별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이리 서둘러 가족을 갈라놓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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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 정권에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정권에게 연명 치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권의 사망진단서에 시민의 의분에 의한 외인사라고 기록해 주는 일뿐입니다. 불의한 정권에게 촉구합니다. 제발 뉘우치지 말고 거기에 서 계십시오. 그러면 개정된 세월호 특별법, 백남기 특검, 권력형 비리 수사, 그리고 종국에는 정권교체라는 물대포가 여러분을 정조준 할 것입니다. 그 직사 살수를 맞고 완전히 소멸한 후 정의롭고, 성실하고, 상식을 갖춘 정부가 새롭게 태어나게 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역사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이천 년 전에는 권력자들이 한 의인의 시신을 지켰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탈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한 의인의 시신을 지킵니다. 권력자들이 시신을 탈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권력자들의 시도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천년 전 무장한 병사들도 의인이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듯이 오늘날 무장한 공권력도 우리 손에서 어르신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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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런 포부를 가지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교회. 저에게는 참으로 여러 감정을 일으키는 단어입니다. 저는 자문합니다. ‘교회는, 즉 우리 자신은 정권과 사회에 정의를 촉구할 위치에 있는가?’

 

한때는 민주화의 성지였고, 약자들의 도피처였던 명동대성당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고객의 편의를 세심하게 보살핀 상점들, 넓게 조성된 주차장, 세련된 인테리어,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배려한 각종 시설, 서비스와 재화의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들, 그리고 그러한 광경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금융기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성전은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인근의 노숙자도 사라지고, 어설픈 음악을 틀어 놓고 자비를 청하는 걸인도 사라지고, 불우이웃 기금을 모금한답시고 시끄럽게 노래하던 추레한 복장의 사람들도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찾아 성전에 오는 이들의 심사를 복잡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추한 몰골은 우리 마음 안의 어두움을 투사하게 하였고, 우리 양심의 제일 약한 부분을 건드려 우리를 심란하게 했더랬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런 광경은 사라지고 우리는 어떠한 불편감도 없이 이 위대한 성전에서 사고, 팔고, 먹고, 떠들고, 그에 더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년 전 저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신간 출판을 앞두고 교구의 검열을 받기 위해 원고를 들고 교구청을 찾은 일이 있습니다. 신축 교구청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저의 소속과 이름을 적고, 제가 용무를 보려는 층으로만 저를 데려다줄 엘리베이터 전자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제가 용무를 볼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묵직한 유리문을 열고 사무실들이 있는 복도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건물을 들어선 지 한참 되었는데 오가는 사람도, 맞아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린 곳이라 배웠는데 저는 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제가 안전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긴 예로부터 교회는 자기를 보호하는데 철저했습니다. 깔끔하게 신축된 그 건물 안에서 저는 어떤 온기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웅장한 건축물은 저를 환대하기보다 큰 무게로 저를 주눅 들게 했습니다.

 

세속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룩함의 상징이었던 명동대성당, 종교에 냉담하던 이들에게 그나마 마지막까지 망설임을 안겨 주던 그 높게 솟은 첨탑은 그렇게 변했습니다. 지저분함도 사라지고,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던 험한 사람들도 사라지고, 갈 곳을 못 찾아 우왕좌왕하며 모르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길을 물어야 하는 그 번거롭고 불필요한 인간관계도 사라지고, 생명체라면 뿜어낼 수밖에 없는 비효율성과 자연스러운 모순들도 사라지고, 듣기만 해도 달콤한 자본이, 편의성이, 여유가, 뽐내고픈 위용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낡은 곳간을 헐어내고 크고 효율적인 곳간을 지어 자신의 재물을 모아 둔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이제 교회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근본정신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재물 속에 죽음을 기다리는 부자처럼 교회도 죽음을 앞둔 것은 아닙니까?

 

며칠 전부터 우리는 천주교인으로서 얼굴을 떳떳하게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국 최고의 복지시설임을 자부하던 대구의 희망원에서 벌어진 믿기 어려운 비리와 반인권적인 행태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 전체 생활자의 10%에 달하는 129명의 소중한 목숨이 불빛을 잃었습니다. 이 고귀한 생명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혹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부 종사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금전적인 비리, 환자들에 대한 부적절한 투약과 부실한 돌봄, 적절하지 못한 시스템으로 인해 방치된 생활자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과 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차례 내부 제보가 있었음에도 책임자들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제보자들의 입을 막기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을 통해 추한 몰골이 그대로 노출되고 난 후에서야 대구대교구는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국민의 안위는 팽개쳐 두고 자신의 사익과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정권을 비판합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권의 허술한 국가운영 시스템을 비판합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권의 이름으로 가장 약한 이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에 대해 울화를 터뜨립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온갖 문제와 비리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정권의 교활함을 욕합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말하는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들입니까?

 

사실 희망원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내 여러 교구와 수도회는 예수의 사랑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복지시설, 청소년시설, 그 외 다양한 사회사업을 수탁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단체의 법인화와 기관 수탁운영은 종교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경직된 신념으로 가득 찬 성직자, 수도자들이 기관의 관리자가 되면서 기관의 민주적 운영은 요원하게 되고 시대의 요구에도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목격합니다. 이에 더해 성직자, 수도자 중 상당수는 관련 분야의 전문성을 지니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평신도 종사자의 성장과 전문성 발휘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지자체로부터 지원금을 받거나 기관을 수탁 받아 운영하면서 복지사업은 복음적 인류애를 넓게 펼치는 수단이 아니라 교구 및 수도회의 생계와 영향력 유지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모험심에 가득 차 본질적 이상을 향해 투신해야 할 수도자들은 견고한 기관의 시스템에 복속되어 자유와 투쟁, 모험의 가치를 포기한 채 메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법인으로서 기관 운영에 나서는 모든 단체는 내부의 정치적인 갈등이 반드시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그것도 권위라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며 사업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난 결정과 행태들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화나는 일입니다. 우리 눈의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내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관리직을 맡고 있는 성직자, 수도자의 감정적 불균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주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권위라는 수단으로, 심지어 신의 이름을 빌려 이런 부당한 상황을 무마시키고 있습니까? 교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까? 자본과 권력이 주는 안정감에 부지부식 간에 몸을 틀어박은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에 요구하는 같은 질문과 요구를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부터 쇄신해야 합니다. 거기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향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목적지는 같아도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저 역시 제 나름의 선택을 하며 저의 길을 갑니다. 저는 이 길 위에서 꼭 만나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학 서적을 탐독하는 공장 노동자, 농부가 되는 게 꿈인 10대 청소년, 오페라를 사랑하는 분식집 여사장님,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은 택배 기사 아저씨, 종업원 300인의 중견 기업을 운영하는 20CEO,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방대 출신의 게이 대통령, 본당의 의사 결정에 딱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는 주임 사제, ‘대출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신혼부부, 유일한 걱정이 졸업인 무상 교육 시대의 대학생, 암 선고를 받은 남편 때문에 통장을 들춰 보지 않아도 되는 50대 아내, 부산 시댁의 사투리를 공부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평양 며느리, 승객들을 구조시키고 배와 함께 가라앉은 침몰한 여객선의 선장, 시위대의 안전과 편의를 염려하는 경찰청장, 더함도 덜 함도 없이 서로 나누며 평화롭고 공존하고, 존엄하게 죽어가는 나라의 백성들. 이들이 함께 만드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재산이 생명을 앞지르지 않고,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우뚝 서는 세상.

 

가사의 문학성을 인정받아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대중가수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라는 곡은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올려다 보아야 하늘을 보게 될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사람들의 통곡 소리를 듣게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이미 많은 이가 죽음을 당했음을 알게 될까? 친구여, 대답은 부는 바람 속에 있다네. 대답은 그 바람 속에 있어.” 우리가 꿈꾸는 세상으로 가자니 길이 멀고 멉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이 아무리 멀어도 그리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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