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수도회 CONGREGATIO JE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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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0일 시국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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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님평화 작성일16-06-22 08:07 조회4,231회 댓글0건

본문

시국기도회 집전순서

 

6월 27일 의정부교구

7월 4일 인천교구/ 11일 청주교구/ 18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 한국외방선교회

(집전 순서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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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월.

 

 

보수주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강론_ 고계영 신부_작은형제회

  

27444F375768FF9830B615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시국 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세월호 문제의 의로운 해결이나 부조리한 시국의 문제를 보다 정의롭게 변화시키고자 애쓰시는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 형제자매님들께 늘 존경스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적절한 자리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희생과 고통을 견디면서 정의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강론에 앞서, 먼저 경의를 표하고, 늘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수고의 땀을 갚아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 받을 것이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다른 복음 구절보다 유난히 더 제 가슴을 찌르곤 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먼저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보수주의라는 티끌, “보수주의라는 들보에 대해 숙고해 보고 싶습니다.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 대사제 카야파, 카야파의 장인이자 대사제였던 한나스, 대사제 가문의 사람들,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던 헤로대 안티파스 영주, 최고 의회 의원들과 수석 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로마 병사들과 성전 경비병들, 일부 유다 군중들,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는 이들, 어떻게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형에는 한 마음으로 찬성을 했을까요?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이라는 보수주의 욕망, 그 욕망이 십인십색, 백인백색인 저들을 하나로 의기투합시킨 것 아닐까요?

 

예수를 십자가 형에 넘긴 자는 빌라도가 아니라,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보수주의 욕망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형에 동의한 자는 카야파와 한나스가 아니라,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보수주의 욕망입니다.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한 자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보수주의 욕망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시킨 보수주의 욕망은 저쪽만의 욕망일까요, 나의 욕망은 결백할까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보수주의 욕망은 내 안의 보수주의 욕망과 같지 않을까요?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한 대 헤로대의 보수주의 욕망 또한 나의 보수주의 욕망과 똑 같지 않을까요?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보수주의 욕망은 바로 나의 욕망 아닐까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죄악과 비극들은 거의 대부분 보수주의에 의해 빚어졌고, 20세기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히틀러와 나찌즘의 보수주의, 스탈린의 보수주의, 크메르 폴 포트의 보수주의, 중국 문화 혁명의 보수주의를 위시하여 최근의 미국 조시 부시 정권의 보수주의 등 정치적 보수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근본주의,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힌두교 근본주의, 유다 근본주의, 팔레스타인 근본주의 등 종교 근본주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보수주의 등 종교적 보수주의의 폐해나 해악도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저는 우리 사회의 가장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세력은 보수주의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지금 이 순간 몸담고 있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조금 멀리는 을사오적, 경술국치, 친일파들의 보수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무고한 대학생과 시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군사 정권의 보수주의, 그리고 우리 사회 곳곳에 물들어 있는 보수주의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작은 조직이든 큰 조직이든, 끊임없이 사고를 일으키는 다양한 조직 내 보수주의, 따돌림 문화 안에 숨어 있는 보수주의와 직장 안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는 보수주의, 학교 문화 안에 독처럼 피어나는 보수주의, 가족을 소외시키고 파멸시키는 가정 내 보수주의, 개인적 보수주의와 공동체적 보수주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보수주의, 우파 정치가들의 보수주의와 좌파 정치가들의 보수주의, 북한 정권의 보수주의와 남한 정권의 보수주의 등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보수주의의 덫에 걸려 있고 보수주의 독 안에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보수주의 욕망!

 

부풀리고, 과장하고, 떠벌리고, 지저분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덮어씌우고, 발뺌하고, 변명하고, 뒤통수 치고, 배신하는 보수주의의 지혜와 지략은 하늘을 찌릅니다.

 

보수주의 욕망이 있는 곳, 더럽고 악취 나고 부패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간악하고 구역질이 납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혹, 가장, 위선, 속임수, 허위, 날조, 조작, 변질, 위장, 비호, 탈세, 불의, 부조리, 부패, 부정, 타락이 판을 칩니다. 신물이 납니다. 이런 보수주의가 그들만의 욕망일까요? 저쪽의 욕망만 해결하면 지상 낙원이 도래할까요?

 

저쪽의 보수주의의 욕망과 내 안에 숨어 있는 보수주의 욕망은 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동일하지 않을까요? 저는 제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보수주의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애를 쓰고 발버둥 쳐도 끊어지지 않는 악습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집착을 하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보수주의 등등 제 안에 들러 붙어 있는 보수주의는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이런 보수주의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데, 다시 말해 회개하는데 있어 장애물이 됩니다.

  보수주의를 가지고 있는 한,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내 안에 들러붙어 있는 보수주의를 떼어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보수주의자가 보수주의를 떼어 놓으면 가능하겠지요. 아무튼 보수주의를 달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회개란 내 안에 깊이 스며 있는 보수주의, 내 안에 암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보수주의를 철저하게 바라보는 것이고, 온전하게 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수주의가 우리 안에 박혀있는 티요 들보 아닐까요?

 

보수주의가 내 안에 있으면, 일차적으로 내가 불편하고 내가 불행합니다. 혹시라도 오해될까 조심스럽습니다만, 세월호 비극을 덮어두려는 쪽의 보수주의도 심각하지만, 이를 끝까지 밝히겠다는 쪽의 보수주의도 그 못지않게 심각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겪는 의로움 안에도 보수주의가 독처럼 숨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어떤 죄든 인간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고백으로 읽혀집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 잘못을 철저히 밝히고 가려 처벌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구원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 없이 햇빛을 내려주시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 공로와 관계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나 어머니 마리아 입장에서 바라보면, 너무도 억울한 사건이고 원통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억울하다며 자신의 무죄함을 철저하게 밝히시고 법적으로 증명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이없게도 죄를 뒤집어 쓰면서도 정의를 부르짖지 않으셨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며,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는 억울함과 부당함, 불의, 부정, 부조리를 끝까지 철저하게 파헤치고 진위, 시비곡직, 정과 사를 가려 그에 따라 인정사정없이 철저하게 처벌하는 곳에는 십자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너무 우파적인 해석인가요?

 

시민 혁명사적인 관점에서, 정치사회사적인 관점에서,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봉헌하는 시국 미사는 정당하고 양심 있는 시민과 지성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국 미사와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에도 십자가의 희생과 고통의 신비가 어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신비의 본연의 의미는 부당함과 억울함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민 혁명사적인 관점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바라보면, 억울함의 관점이 달라집니다.

 

한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부모 자식 사이에, 그리고 자녀들 사이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사실을 철저히 밝히고 잘못한 정도에 따라 철저하게 처벌을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 안에 정의는 세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가정은 숨 막히는 가정, 삭막한 가정, 기쁨과 평화가 파괴되는 가정이 되지 않을까요? 잘못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주고 억울함이 있더라도 서로 품어 줄 때, 그 가정은 따듯한 가정, 위로를 받는 가정, 사랑이 살아 있는 가정, 생명이 살아나는 가정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나의 보수주의, 먼저 남의 티를 빼내려는 나의 보수주의를 정지하고, 나의 억울함을 묵묵히 받아들이라는 권고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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