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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미사 9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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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님평화 작성일15-09-09 07:55 조회4,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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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쌍용차 사태의 원만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

 

2015.09.08.화.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 앞

주최 : 수원교구 평택지구 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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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강론 : 최재철 신부(수원교구 비전동성당)

 

 

2319863755EEF21E2A3FB3상처 극복을 위해서, 한 번은 상처와 마주쳐야 한다. 상처가 끔찍할수록 꽁꽁 감추는 일은 위험하다. 억눌린 상처가 인생 전체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간 걸리더라도 설사 고통을 다시 겪게 되더라도 한 번은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유배된 상처가 저절로 낫는 일은 없다. 동굴에 틀어박힌 유배된 상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그 사람이 못났거나 잘못된 운명을 타고 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를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중에서. 작가 배르벨 바르데츠키

 

평택은 큰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고 있는 도시입니다. 대추리가 그랬고, 쌍용차가 그랬습니다. 아니 쌍용차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는 많은 평택시민들은 그 상처를 외면하려합니다. 팽성 대추리 주민들을 외면하려 했고, 노동자와 가족들 자살과 심장마비 등으로 죽은 28명의 생명을 애써 외면하려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 일까요? 마음이 편해질까요? 지지부진한 노··사 교섭,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교섭의 진척을 이루고자 단식에 나선 김득중 지부장의 단식이 9일째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를 바라보며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마음이 무지하게 불편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평택시민들은 자신들의 곁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굳이 내 출근길에 보이지도 않는 일들을 찾아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같은 평택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미사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신 다음, 되물으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두 문장은 언뜻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는 어디까지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고 말씀하신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성전에서 일을 하는데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서 애써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가는 그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멀리 돌아가 지나갔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고 십일조내고 하는 것들로 마치 정기 적금을 붓듯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원한 생명의 티켓을 따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시작되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시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입니다. 복음의 끝부분 결론에 결국 이렇게 나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는 것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도 되새기고자 합니다. “저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아닌,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저는 평택에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추론할 수 있는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저는 신학적으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수도 있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노동자였을 수도 있고,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며 일꾼을 고용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큰 사업장을 이끌며 노동자들을 학대하거나 마음대로 짜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노동조합을 하며 고용주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보다 못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다시 갑질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쥐꼬리만 한 수입으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을 어떻게 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청백리일수도 있고, 탐관오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 넓은 사람일 수도 있고, 주변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밥그릇만을 챙기기에 바쁘거나 군소리 없이 일해서 진급이나 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갖은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눈감고 그 자리를 회피해서 마음 편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핑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강도를 만나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고, 사지로 내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조건을 따져서 이웃이 되어주거나, 착한 사람 내가 친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하고, 그것은 우리의 상처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요, 평택시민들의 문제요, 대한민국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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