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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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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님평화 작성일14-03-27 14:27 조회8,12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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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기념일이다. 나는 이 날을 기념하고자 그분의 생애에서 가장 장쾌했던 1909년 10월 26일 의거와 가장 거룩했던 1910년 3월 26일 순국을 재구성하였다. 나는 의거 100주년 기념일 날인 2009년 10월 26일부터 아흐레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장을 그대로 추적한 뒤 순국 100주년 기념일 2010년 3월 26일 <영웅 안중근>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기사는 그때의 취재노트를 다시 펼쳐 2회로 축약, 그날의 장쾌한 의거와 거룩한 순국의 모습을 무딘 필치로 그려보았다. - 기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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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감방의 책상과 의자. 여기서 숱한 유묵을 남겼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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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5일 저녁

1910년 3월 25일 저녁, 뤼순감옥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중근에게 귀띔을 했다.

"내일 오전에 형 집행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에서부터 안중근을 호위하고 뤼순감옥 수감 동안 내내 감시해 왔다. 안중근은 그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은 이제 시작했을 뿐인데….'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탈고 때까지 형 집행을 연기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곧 그의 뜻이 아닐 거라고 곧 마음을 추슬렀다. 안중근은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긴 묵상에 잠겼다. 사형수답지 않게 그의 마음은 명경지수로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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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을 떠나기 직전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의연한 모습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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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6일 아침

1910년 3월 26일 날이 밝아왔다. 감방 창문 밖으로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예삿날과 마찬가지로 몸가짐을 가다듬은 뒤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이생에서 마지막 아침밥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간수 지바가 찾아와 머뭇거렸다. 안중근이 눈치를 채고서는 물었다.

"어제 부탁한 것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쓰지요."
"감사합니다."

지바는 고개를 숙여 예를 드리고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책상 위의 벼루에 먹을 갈았다.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수감된 뒤 숱한 글씨를 남겼다(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200여 점을 썼다고 하는데 현재 확인된 것은 50여 점이다). 그때 안중근의 머릿속에는 문득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8자가 떠올랐다. "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은 마음속으로 읊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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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마자막으로 쓴 유묵(안중근기념관 소장).
ⓒ 안중근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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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이것을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던 거야.'

안중근은 붓을 들고는 온 정성을 다해 힘차게 써내려갔다.

爲國獻身軍人本分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아주 통쾌했다. 마치 농부가 추수를 끝낸 들판을 바라보는 흐뭇한 심정이었다. 아니 목동이 양떼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심경이었다. 군인이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뿌듯한 마음이었다.

안중근은 온갖 정성을 다한 화룡점정의 마음으로 왼손에 먹을 묻힌 뒤 낙관을 찍었다.

"신품(神品)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지바가 감동하면서 말했다.

"그동안 고마왔소."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그 뒤 지바는 뤼순감옥 근무를 마치고 간수직을 퇴직했다. 지바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센다이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면서 그의 집 한편에 안중근의 반명함판 사진과 이 유묵 족자를 신주처럼 모셨다.

그는 그곳에서 아침저녁으로 안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1944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아침저녁 안중근의 사진과 유묵 앞에서 예를 드렸다. 그들 부부는 후사가 없자 조카 미우라를 양녀삼아 이 일을 잇게 했고, 미우라는 뒷날 이 유묵을 한국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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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가족, 부인 김아려(마리아) 여사와 큰 아들 분도(오른쪽), 그리고 둘째 준생(안 의사 의거 직후 하얼빈에서).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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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안중근은 형장을 가기 전에 두 아우 정근, 공근을 면회했다. 안중근은 담담한 말로 아우들에게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두 아우가 형의 사형 집행 전 마지막 면회임을 알고 비통해 하자 나무랐다.

"나는 티끌만한 상심도 없는데 너희가 왜 그러냐?"

그 말에 아우들도 마음을 가다듬자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오직 늙으신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라. 앞으로 정근은 공업에 종사하여 한국공업의 후진성을 벗어나는데 이바지해 주고, 공근은 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들 분도를 꼭 신부로 만들어 달라."

안중근은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온 뒤 어머니가 동생 편에 차입해준 흰 명주저고리와 검정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런 뒤 그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다음 이승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안중근은 두 간수가 양팔을 잡고 이끄는 대로 교형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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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 3. 26. 10시 직전으로 안 의사가 간수의 안내로 의연하게 교형장으로 가고 있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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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다음 마지막 유언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안중근의 말이 끝나자 형 집행 간수가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맸다. 그런 뒤 안중근을 부축, 계단을 오르게 하여 교수대 위에 세웠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구리하라 전옥이 이를 허락하자 안중근은 교수대에서 3분 남짓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가 끝나자 안중근의 목에 밧줄이 드리웠다. 그때가 오전 10시 4분이었다. 곧 흰 천이 내리고 철거덕 교수대 밑 마루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그로부터 15분 뒤, 뤼순감옥 전속의사가 바닥에 떨어진 안중근 의사의 절명을 확인했다.

사형 집행 후 안중근의 두 동생은 뤼순감옥 측에 안 의사의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끝내 일본은 이를 들어 주지 않았다.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기에 때문이었다.

안중근의 유해는 송판으로 된 관에 안장된 채 그날 오후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날 새벽부터 내린 보슬비는 하관할 때까지도 내렸다. 이천만 대한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안중근 의사에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뒷날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 의사의 총탄을 발에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이사의 회고담이다.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神)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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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의사가 순국 후 묻혔을 것으로 보이는 옛 뤼순감옥 묘지, 대련 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이 그 당시 뤼순감옥 측의 사형수 시신 처리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일본이 안 의사 유해를 특별히 관리해 오지 않은 한, 그것을 찾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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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낙조

그날 안중근 의사의 하관을 마치자 날씨가 활짝 갰다. 그날 해가 질 무렵에는 뤼순 앞바다가 저녁놀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늘이 한 영웅의 순국을 기리고자 베푸는 장엄한 낙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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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옥산에서 내려다 본 천연 요새 뤼순항으로 근세 중, 일, 러시아 3국의 각축장이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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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시인 조지훈은 안중근 의거 그날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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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지음, <영웅 안중근>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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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 날 하얼빈 역두(驛頭)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 줬을까
……….
- <안중근 의사찬(安重根 義士讚)>



안중근 의사 만세!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만세!
영웅 안중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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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옮겨왔습니다.